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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에 실린 여행기

[낙동강 Magazine VOL.09] 대구, 골목으로 다시 살다-근대골목투어 2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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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골목투어 2코스는 근대문화라는 부제를 달았다. 근대... 우리에겐 가장 가까운 과거이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낯설게 느껴지는 역사이기도 하다. 한반도가 살아온 긴 흐름에 비하면 찰나의 순간으로 지나갔지만 그 시간이 토해놓은 상흔은 어느 때보다 깊고 짙었다. 그러나... 깊숙하게 스며들어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상처에 새살이 돋아나고, 이윽고 꽃을 피웠다. 1.54km의 짧은 구간은 대구골목투어의 꽃이자 별이 되었다.

 

대구 골목투어는 이미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관광의 1번지이다. 덕분에 누가 찾아도 어려움 없이 오갈 수 있는 편안한 여행길이 되었다. 그 길을 따라 걸음을 재촉하다가 미안스러운 마음에 발길을 멈추었다. 짧고 빠르게 둘러보는 건 왠지 역사를 품고 있는 골목길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조금 둘러가도, 천천히 음미해보고 싶은 마음에 들고 있던 지도를 던져버렸다.

 

 

() 문화의 전래길, 동산일대 → 종로골목

 

 

동산일대

 

 

 

새로운 것은 설레임과 기대를 가지게 하지만 늘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느 날 문득 찾아온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무엇을 선택해야할까? 대구골목투어 2코스가 시작되는 동산에 오르면 수용과 거부의 경계에 서 있는 그날의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이국적인 정취로 가득한 동산일대는 100년 전에만 해도 대구 중앙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 노릇을 톡톡히 했을 것이다. 그곳에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와 터전을 잡고 붉은 벽돌집을 지었다. 허물어진 대구읍성의 돌들을 가져와 기초를 세우고, 그 위에 서양식 벽돌을 쌓았다. 벽돌 위에 얹어진 우리네 기왓장과 그네들의 스테인드글라스가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그들이 쌓아 놓은 것은 벽돌만이 아니었다. 기독교라는 서양의 정신과 당시엔 첨단이었을 서양 의학도 함께 풀어놓았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24(스윗즈주택), 25(챔니스주택), 26(블레어주택)인 서양식 건물 3채는 현재 선교박물관, 의료박물관, 교육역사박물관으로 재개장하였다. 선교박물관은 개신교 전파를 위해 파견된 선교사들의 활동과 그들이 사용했던 성경, 성물들을 볼 수 있으며 의료박물관에서는 제중원에서 시작해 현재의 동산병원이 되기까지 역사와 각종 의료기기들의 변천사를 살펴볼 수 있다. 교육역사박물관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제정된 1차 교육과정부터 지금까지의 교육 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3.1운동과 관련된 역사적 사료들도 만날 수 있다. 특히 대구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전개과정과 당시 사용되었던 물건들은 어른들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의미있는 볼거리이다.

 

 

 

 

3.1운동길

 

 

 

 

우리의 근대가 아픈 이유는 지금까지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그들의 때문이다. 191931,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대구까지 내려오는데 꼬박 1주일이 걸렸다. 만세운동에 동참하기로 맘먹은 인근 고등학교 학생들은 38일을 결전의 날로 잡고, 경찰의 눈을 피해 장사꾼으로, 빨래터로 가는 아낙으로 꾸며 집결지인 서문시장으로 향했다. 90개의 계단이 차곡차곡 놓여 있는 이곳은 일본의 만행에 항거하는 젊은이들의 용맹스런 외침이 서린 곳이다. 3.1운동 당시의 위급함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힘찬 태극기의 물결이 출렁이고 있다. 그 사이에 가위바위보를 하며 계단을 오르내리는 아이들, 사랑스러운 포즈로 기념촬영하고 있는 연인들의 웃음소리가 가득 채워졌다.

 

 

계산성당 & 제일교회

 

 

 

 

 

우리에게 전해진 서양문물의 중심에는 기독교라는 서양종교가 자리하고 있다. 3.1운동길을 따라 내려오면 뾰족하게 솟아오른 첨탑과 십자가가 눈에 띤다. 대구 최초의 성당인 계산성당은 높은 첨탑과 스테인드글라스, 수많은 직선들이 교차하고 있는 전형적인 고딕양식의 건물이지만 처음부터 이런 형태는 아니었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신에게 가까이 가고픈 인간의 염원이 담겨있는 만큼 교회(. 가톨릭 성당과 개신교회를 모두 일컫는다)는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프랑스에서 건너온 김보록 바오로 신부(Achile Paul Reobert) 역시 동산을 눈여겨 두고 새 성당을 지으려 했으나 노인들이 오가기 힘든 길이라 생각하여 지금의 자리에 성당을 지었다. 건물 또한 한국 전통의 한옥양식으로 지었으며 아름답게 단청까지 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그 단청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이 스님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렇게 세워진 성당은 재건을 거듭하며 지금의 모습으로 남았다. 아름다운 단청이 있는 특유의 성당건물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벽돌식 건축양식에 한 획을 더했으니 그것만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다 하겠다.

계산성당 뒷문을 통해 약전골목으로 향하면 또 하나의 서양식 붉은 벽돌 건물을 만나게 된다. 경북지역 최초의 개신교회인 제일교회는 붉은 벽돌 사이에서 도드라진 하얀 지붕 종탑이 백미를 자랑한다. 뿐만 아니라 5층 종탑에 난 창문들은 모양도 위치도 가지각색이다. 제일교회의 진풍경은 푸른 담쟁이와 붉은 벽돌의 어울림에서 찾을 수 있기에 푸른 생명이 움트는 봄부터가 여행의 적기이다. 지금은 더 이상 교회당으로 사용되지 않아 하나의 보존 문화재로 남게 되었다. 동산으로 옮겨 신축한 제일교회는 순백의 대리석이 화려함을 뽐내지만 묘하게도 생명력을 잃은 과거의 교회건물이 더 장중하고 정답게 느껴진다.

 

 

종로: 화교협회, 화교소학교, 중국집 골목

 

 

 

 

1900년대 초반, 외국문물의 유입 속에서 조금은 친숙한 문화를 만날 수 있었으니, 종로에 자리잡은 화교들이다. 항구도시도 아닌 전형적인 내륙도시에 이렇게 다양한 문화가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이 놀랍지만 덕분에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어 고맙기도 하다. 중일전쟁과 공산당 혁명을 경험하면서 혼란을 피해 들어온 중국인들이 대구에 정착했다. 국내 최대의 약령시장과 서문시장을 찾아왔다는 의견도 있다. 어찌됐건 이곳에 정착한 그들은 자치단체를 만들고 자녀를 위한 학교까지 세웠다. 종로 일대는 대구에서 이름난 중국요리를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동네 중국집이 식상해졌다면 이곳에서 색다른 중국음식을 맛보는 것도 생활의 활력소가 된다.

 

 

◎ 대구 르네상스(Renaissance)

 

 

 

 

이상화 고택, 계산예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점이 피렌체라고 한다면 대구의 르네상스는 계산동 일대를 거점으로 한다. 물론 그들의 르네상스와 우리의 르네상스가 같을 수는 없지만 그들 못지않은 열정으로 예술의 혼을 불태운 사람들이 있다. 이상화, 현진건, 이장희와 같은 문인들과 김진균, 박태준으로 대표되는 음악가, 최근 들어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이인성, 박가돈과 같은 미술인들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활동으로 계산동은 예술의 성지가 되었다. 지금 남아있는 이상화고택은 시인이 말년을 보낸 곳이다. 재개발로 인해 사라질 수 있었던 이곳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문화인들과 시민들의 관심과 노력 덕분이었다. 문화재 복원사업으로 새롭게 지어진 고택의 대문을 들어서면 그나마 장독대와 펌프가 당시의 모습을 반영한다. 특히 마당에 남아있는 펌프는 개중에 가장 오래된 흔적으로 동네사람들에게 공동 우물의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사람이 찾지 않는 어느 늦은 밤, 상화시인이 되살아나 마당을 거닐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구를 읊조리고 있을 것만 같다이들 예술가들의 작품과 행적들은 계산예가에서 만날 수 있다.

 

 

 

 

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 하고 어둔 밤 물결도 잦아지려는도다.

아, 안개가 사라지기 전으로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나의 침실로 중에서, 이상화>

 

 

 

 

서상돈 고택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 서상돈 고택이 자리한다. 지물행상과 포목상을 하며 부호가 된 서상돈은 국권과 경제를 침탈하려하는 일본의 만행에 분노하며 집안의 부()를 기꺼이 국가를 위해 사용하기로 맘먹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동요했다. 고택에 들어서면 주변의 여느 주택과 다름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최고의 부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살았을까하는 기대를 가졌다면 조금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대궐처럼 넓고 웅장한 집에서 생활했다면 국채보상운동은 대구가 아닌 다른 곳, 어쩌면 우리 역사 안에서 그 이름을 찾아보기 힘들지 않았을까. 소박한 고택에서 나라를 움직인 기품을 느껴며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되새겨 본다.

 

 

 

 

진골목

 

서상돈 고택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아녀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담배를 끊어 자본을 마련하자는 취지였기에 여성들의 참여는 생각지도 않았지만 이러한 움직임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하며 그녀들은 가락지와 비녀를 내어 놓았다. 여성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지점이 바로 진골목이다. 본디 달성서씨의 집성촌이었던 진골목은 시간을 박제해놓은 듯하다. 길게 늘어선 좁디좁은 골목은 2코스 근대문화투어의 하이라이트라 칭해도 모자람이 없다.

 

 

 

 

 

대구에서 처음으로 생겼다는 2층 양옥주택(정소아과)은 드디어 일반인에게도 서양식 건물이 전해졌음을 보여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진료가 이루어졌던 병원은 현재 굳게 문을 닫아걸고 있지만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소아과라는 타이틀을 지키며 오늘도 자랑스럽게 이름을 내걸고 있다. 진골목의 새로운 테마는 먹거리이다. 부자들이 모여 살았던 곳인 만큼 고급 요정집이 많았다고 한다. 옛 요정은 한정식집으로 탈바꿈하여 사람들을 맞이한다. ‘백록과 같은 운치있는 요정에서 배를 채우고, 미도다방에서 마시는 쌍화차 한잔에 나도 박제된 시간 속으로 빠져들어 하나의 그림이 된다.

 

 

◎ 대구 영(令)바람 쐬러 가는 길

 

 

 

 

 

2코스 투어의 마지막은 약전골목이다. ‘대구 약령시를 거치지 않은 약재는 완치하기 힘들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당시 대구 약령시에 대한 신뢰는 높디높았다. 때문에 특별한 이유가 없더라도 한의원이나 한약방을 하는 사람들을 대구 약령시장을 다녀와야 했다. 혹자는 옛 영광에 비해 침체된 한의약 시장을 보며 한숨을 쉬기도 하지만 대구약령시장은 여전히 전국 최고의 저력을 가진 전문약재시장이다.

약전골목에 들어서면 내 몸에 있는 모든 감각 세포들이 힘차게 일어서는 것 같다. 아로마 효과인지, 플라시보 효과인지 알 수 없지만 약재들의 향기만으로도 꽤나 건강해짐을 느낀다. 한약재들의 효능과 효과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약령시의 옛모습을 재현해 놓은 한의약박물관을 찾으면 된다. 주변에서 보기 힘든 약재들을 원형그대로 볼 수 있으며 약재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특히 전시실을 돌아보고 난 뒤에는 한약을 첨가하여 족욕을 할 수도 있고, 한약재로 만드는 비누, 화장품 등을 실제로 만들어볼 수 있어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 여행으로 마무리할 수 있다.

 

 

 

 

최초라는 이름이 무색한 대구골목투어 2코스는 1.54km의 가장 짧은 구간이지만 넘쳐나는 볼거리들이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시간이 멈춘 골목에서 잠시 길을 잃어보자. 그리고 기꺼이 그 시간 속으로 빠져들어 보자. 그러면 진짜 골목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대구골목투어 2코스 지도: http://gu.jung.daegu.kr/alley/main/main.html(중구청 골목투어 홈페이지)>

 

※ 지면의 사정상 담지 못한 내용들은 개별 포스팅으로 안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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