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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에 실린 여행기

남산 100년 향수길을 거닐며...(대구 근대골목투어 5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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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골목기행, 5코스

 

어린 시절, 골목은 자랑할만한 놀이터였다. 변변한 놀이기구 하나 없었지만 볼거리와 이야기 거리가 넘쳐나는  다이나믹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현대화라는 이름을 걸고 골목을 잠식한 아파트는 좁은 골목 대신 광장을 만들었고, 사람들은 어느새 그 모습에 익숙해져 갔다.

 

나만 그랬을까. 넓은 공간이 오히려 갑갑하게 느껴지던 그 때, 대한민국 걷기 열풍을 타고 다가온 골목과 다시 만났다. 덕분에 아련한 추억을 곱씹는 장소로 새로 태어난 골목길... 대구 도심을 거미줄처럼 엮어 만든 중구 골목투어의 다섯 코스는 이제 대구를 너머 전국에서 찾아오는 인기 여행지가 되었다. 총길이 14.61km, 곧게 뻗은 신작로와 비교한다면 터무니없이 짧은 길이지만 그 속에 자리잡은 볼거리는 하나의 박물관을 능가한다. 이제 그 길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겨울은 무언가를 찾아 떠나기에 그리 적합하지 않은 계절이라 생각했다. 그나마 눈이라도 내려주면 어설픈 감상에 빠질 수 있지만 대구에서 눈을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 않나. 황량하고 외롭기만 한 풍경 속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따스한 카페나 영화관을 찾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자라난 방랑벽은 머무르고자 하는 내 몸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골목투어를 시작한지 1년, 제법 차가워진 날씨를 방어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골목투어의 마침표를 위한 길을 나섰다.

 

 

 

 


 

남산 100년 향수길

 


 

대구 골목투어 5코스는 ‘남산 100년 향수길’이라는 부제를 붙여 반월당에서 남산동에 이르는 2.12km의 길을 이었다. 차와 사람으로 가득한 반월당은 명실공히 대구 최고의 중심거리다. 반월당이라는 이름도 이곳에 있었던 백화점의 이름을 땄다. 당시 대구에는 이비시야, 미나카이 등의 백화점이 있었지만 반월당은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백화점이라는 의의를 가진다. 당시 백화점은 사라졌지만 이름은 고이 남아 대구에서 가장 유명한 지명이 되었다. 대구에서 유일하게 두개 노선의 지하철이 오가고, 가장 많은 쇼핑센터와 은행, 음식점 등이 자리하는 것으로 그 유명세를 알 수 있다.

 

 

<이미지 출처: http://gu.jung.daegu.kr/new/culture/pages/tour/page.html?mc=0229(대구중구청 골목투어 안내)>


하지만 이런 번화가도 코너를 돌아 작은 골목에 접어들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한가로운 표정을 짓는다. 여기서부터 1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여행이 시작됐다. 조선시대 무예를 닦던 무관들의 훈련소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장이 된 관덕정,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된 성유스티노 신학교, 성모당,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으로 이어지는 여정은 ‘가톨릭’이라는 하나의 종교를 알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마음을 닫아건다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왜냐하면 앞서 나열한 곳들은 종교적 의미를 가진 곳이지만 대구를 비롯한 경상도 지역에 들어온 초기 서양식 건물로 문화와 역사적 의미도 함께 담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 가진 묘한 힘에 빠져 조금은 경건하게, 그러면서도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은밀한 속살을 만나러 간다.

 

 

 

 

 


 

“한 칼에 내 목을 베어주시게”

 


 

 

피도 눈물도 없는 차가운 돌덩이 위에 알록달록 단청된 꽃이 폈다. 피와 고함소리가 멈출 날이 없었던 이곳이 100여년이 지난 지금 그 넋을 위로하는 고귀한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관덕정(觀德亭)은 경상감영에서 근무하던 군무관의 연병장이자 중죄인을 단죄하는 처형장이었다. 당시 천주교인들은 정치범을 능가하는 사악한 족속들로 분류되어 생사의 갈림길에서 고뇌해야 했다. 내가 가진 믿음을 져버리면 생명을 구할 수 있지만 신앙의 믿음을 선택하면 참수치명(斬首致命)으로 다스려지는 기구한 운명 속에서 얼마나 괴로웠을까. 참수치명이란 십자가 형틀에 양팔과 머리를 묶어 옷을 벗긴 후 목을 베는 형벌을 말한다. 이런 독한 압제에도 굴하지 않고,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했던 한 사람이 이윤일 요한 성인이다. 독실한 신앙인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이런 상황을 피하기는커녕 형 집행자에게 “나를 죽이느라 고생하지 말고 한 칼에 내 목을 베어주시게”라고 말했다니 그 분의 담대함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주님을 향한 성인의 충절을 인정하고 기리기 위해 1984년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현재 대구대교구는 이윤일 요한 성인을 제2주보 성인으로 선포하여 기념하고 있다.


전체 4층으로 구성된 관덕정 순교 기념관은 작은 성당과 한국 천주교의 역사와 관련 유물 자료들을 둘러볼 수 있는 박물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하 성당에는 이윤일 요한 성인과 함께 성 바오로, 소화 데레사, 요한 보스코 등 많은 성인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뿐만 아니라 혹독한 박해를 거치며 순교한 천주교 신자들의 삶을 인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각종 전시실을 둘러보고 나면 전통양식으로 장식한 한청 누각에 이른다. 주로 불교 사찰에서 만날 수 있었던 단청에 비둘기 모양의 성령, 포도나무 등이 그려져 있으니 오묘한 느낌마저 든다.

 

 

 

 


 

“저, 여기 있습니다.”

 


 

 

관덕정을 나서 대구의 명물거리 인쇄골목을 지나면 성유스티노 신학교를 만나게 된다.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이곳은 한 평생 사제로 살겠다고 다짐한 이들이 몸과 마음을 수련하는 곳이다. 입구부터 적막한 분위기도 한 몫을 했지만 미래의 신부님을 양성하는 곳이라 하니 그 엄숙함에 숨조차도 조심스레 내뱉게 된다.

 

대구교구의 초대교구장이었던 드망즈(한국명: 안세화) 주교는 신학교 설립을 중대 교구사업으로 지정하고, 이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국채보상운동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상돈(아우구스티노)가 현 신학교와 대구대교구청 부지를 기증하면서 신학교 설립 기반을 마련했지만 건물을 지어 올리는 비용까지 감당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드망즈 주교는 대구교구의 재정 없이 건설하기로 맘먹고 전 세계에 신학교 건립에 대해 알리기 시작했다. 또한 신학교와 대구교구의 주요 시설들을 완공하게 되면 성모발현지로 유명한 루르드의 동굴을 재현하고, 성모님께 대구교구를 봉헌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간절한 마음이 통했을까. 성 유스티노의 이름으로 신학교를 설립한다는 조건으로 25,000프랑의 금액을 후원하겠다는 익명의 기부자가 나타났다. 그는 단지 신학생들의 기도만으로도 족하다는 메시지와 함께 수표를 보냈고, 이로써 1913년 신학교 설립을 위한 기초공사가 시작됐다. 드망즈 주교는 명동성당 설계에 참여했던 프와넬 신부를 불러 내리고, 중국의 벽돌공과 기술자들을 한데로 모아 로마네스크 양식의 신식 건물을 세웠다. 허허벌판, 건물이래야 나지막한 초가와 기와건물이 모두였을 이곳에 세워진 붉은 벽돌건물은 지금 생각하기에도 강렬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ㄷ자로 지어졌던 건물 가운데 현재는 중앙의 유스티노관 만이 남았다.

 

“너 어디 있느냐?”
“저, 여기 있습니다.”라는 부르심과 응답의 메아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유스티노관 회랑을 휘감고 있다.

 

 

 

 

 

올해로 개교 100주년을 맞은 대구가톨릭대학교는 이곳을 유스티노신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관으로 명명하고, 신학교 건축과 관련된 자료와 대구교구의 역사를 전시하여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유스티노관의 하이라이트는 성당으로 사용했던 유스티노홀이다. 정면의 제대를 향하지 않고, 서로 마주보는 형태의 좌석배치도 흥미롭다. 놀라운 것은 김수환 추기경도 이곳 신학교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13세가 되던 해, 어머니의 바람에 따라 신학교에 들어간 추기경은 18년간의 신학생 시절을 회고하며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마뜩잖은 마음으로 선택한 길이었지만 하느님의 손길은 언제나 그와 함께 했었나 보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자 세계 최연소 추기경으로 서임되는 영광까지 얻었으니 말이다. 종교인이 아닌 사람에게도 존경을 받는 인물로 한 평생을 살았던 추기경님의 어린 시절 모습이 영화처럼 스쳐지나간다.

 

근대 건축물로 높은 가치를 지닌 유스티노관은 각종 영화와 드라마에도 심심찮게 등장했다. 영화 <신부수업>, <도둑들>, 드라마 <각시탈>, <서울 1945> 등은 상황과 시대를 대변하는 무대로 유스티노관을 선택했다. 특히 <신부수업>촬영 때에는 배우 권상우와 김인권이 신학생 체험을 위해 이곳에 머물렀고, 짧게나마 신학생들과 공동생활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 앞으로 어떤 영화와 드라마들이 이곳을 배경으로 멋진 영상을 펼쳐나갈지 한껏 기대된다.

 

 

 

 


 

약속을 지킨 외국인 사제

 


 

 

한참동안 신학교 주변을 거닐다보니 드망즈 주교의 다짐이 떠올랐다. 루르드의 동굴을 재현하고, 성모님께 대구교구를 봉헌하겠다는 그는 과연 약속을 지켰을까?

 

 

 

 

 

신학교 담장을 넘어 대구대교구청으로 진입하니 소곤거리는 듯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나도 모르게 그곳을 향해 다가가보니 한창 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순간 드망즈 주교가 약속을 지켰다는 것을 직감했다. 미사가 진행되고 있는 곳이 다름 아닌 성모동굴이었던 것이다. 붉은 벽돌로 성벽을 쌓고 그 아래 프랑스 루르드에 있는 마사비엘 굴을 닮은 암석동굴을 만들고, 성모 마리아와 벨라뎃다 성녀를 재현했다. 그리고 대구교구 1주보로 성모 마리아를 모셨다.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와 양 기둥에 새겨진 1911과 1918은 약속이 이행되었음을 증거한다. “1911년 대구교구로 지정되면서 약속드린 신학교와 주교관, 주교좌성당이 1918년에 완공되었습니다. 크나큰 은총에 감사드리며 약속대로 루르드의 성모동굴과 대구교구를 당신께 봉헌합니다.”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그 때문인지 가톨릭 신자들에게 이곳은 간절함의 상징이고, 은총의 장소가 됐다. 큰일을 앞두고, 시련과 고통으로 몸과 마음을 가눌 수 없을 때 이곳을 찾아 기도한다. 고요한 가운데 잠시 앉아있으니 세상사의 시끄러움은 사라지고 금새 편안한 마음으로 가라앉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HODIE MIHI CRAS TIVI(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가톨릭은 죽어야 비로소 사는 종교다. 현세에서 바르게 살아야하는 이유는 죽음 이후에 다가올 부활에 대한 희망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을 슬프게 생각하기보다 하느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관문으로 생각하며 기쁘게 맞이하길 권고한다. 물론 현세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이지만 하루하루의 삶이 죽음으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면 그 말이 오히려 위로가 되기도 한다. 대구대교구청 내에는 짧은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고 부르심을 받아 하늘로 간 사제들의 묘지가 있다. 묘지라 하면 을씨년스럽고, 무서울 것 같지만 이곳 묘지에선 편안함이 더 크다. 아마도 평화의 안식을 얻은 그들의 넋이 우리를 위로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HODIE MIHI CRAS TIVI(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는 글귀가 마음에 휘몰아친다. 부정한다고 사라지지 않을 두려움이라면 오히려 받아들이고 제대로 준비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이곳에서 되새긴다.

 

 

 

 


 

금남(禁男)의 공간

 


 

 

대구교구청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붉은 벽돌 건물은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이다. 이곳 역시 서상돈 아우구스티노가 기부한 터의 일부이다. 그러고 보면 서상돈이라는 인물은 대구교구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사실 수녀원을 금남의 공간이라 하지만 수도자가 아니라면 여성이라 해도 자유롭게 오갈 수는 없다. 나름의 규칙과 삶의 방식을 고수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외부인과의 만남으로 하느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하는 마음도 담겨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등지지는 않는다. 언제나 힘든 상황에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람을 돕기 위해 앞장서는 것은 그들의 몫이었다. 1915년 한국으로 파견된 3명의 수녀를 시작으로 현재에 이르게 됐다. 그들의 주요 임무는 선교였지만 노인과 고아들을 보살피고, 병든 자를 수발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세상과 함께 살아온 샬트르 수녀회는 2015년 설립 100주년을 앞두고 역사관을 단장하고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고딕양식의 건물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고, 깔끔하고 정갈하게 정돈된 역사관 내부는 샬트르 수녀님들의 섬세한 손길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살아온 그들의 활동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도 함께 전달된다.

 

 

 

 

짧은 듯하지만 결코 짧지 않은 길을 걸었다. 언제나 익숙하다 생각했던 길이기에 떠나기 전에는 설레임보다 ‘내 너를 다 알고 있다’는 오만함이 더 컸다. 하지만 직접 부딪힌 골목은 나의 오만함을 한 없이 비웃었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골목투어를 모두 끝낸 지금의 나는 출발하기 전의 나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라는 것이다. 조금은 넉넉한 마음으로 일상을 볼 수 있는 여유도 생겼고, 그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고자 하는 호기심도 조금 더 커졌다. 골목은 그런 곳이다. 언제나 마주대하지만 언제나 새로울 수 있는 곳. 아직은 사라지지 않은 골목의 흔적을 안고 아쉬운 매듭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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