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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마을 이야기(Japan)/나가사키(長崎)성지순례

[나가사키] 막시밀리안 콜베신부님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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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베신부님과 요한바오로 2세 교황님>

두 분은 이 곳에서 이렇게 만나셨다.

 

<콜베 기념관>

이 곳의 내부는 콜베신부님의 흔적으로 가득채워져 있다.
일본에 도착하여 일본판 [성모의 기사]를 출간할 때 사용한 인쇄기부터 그분이 생활하셨던 방, 물건 모두가 있다.

 

<입구의 벽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한 가정의 가장을 대신해 죽음을 선택할 때의 모습과
콜베신부님으로 인해 목숨을 건진 사람(가요비니체코)의 실제 사진

 


란드 출신의 콜베신부님은 16세에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막시밀리아노'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1917년 원죄없으신 성모 기사회를 창설하여 [성모기사]라는 소식지를 발간한다. 그 와중에 몸이 허약해 몇 번의 휴양을 가지지만 끊임없는 활동을 해나갔다. 6년간 일본에 머무른 후 폴란드로 돌아가지만 2차대전이 시작되고 1939년(1차, 1941년 2차) 독일 나치에게 체포되어 아우슈비츠로 강제수용된다.

그때 한 명의 유태인이 탈출하게 되고, 이 때문에 10명의 유태인이 본보기로 처형당하게 되었다. 무작위로 뽑힌 죄수들은 음식은 물론 물조차 주지 않고 굶겨 죽이는 아사감방에서 고통스러움에 떨다가 죽게된다.

그 10명에 포함되어 있던 한 명이 자신은 어린 자식과 아내가 있다며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콜베 신부님이 자신은 딸린 가족이 없는 가톨릭 사제이니 자신을 잡아가라고 해 수용소장이 이를 허락했다고 한다. 이 때 신부님의 나이 47세.

신부님 덕분으로 목숨을 구한 사람은 '가요비니체코'라는 사람으로 "그때, 신부님과 이야기하지는 못했습니다. 한마디도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 말이 없이 헤어졌는데, 신부님은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가이드의 말로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꼭 하고 싶었으나 그 자리에서는 말 한마디로 생사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때문에 차마 말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몇 번의 죽을 고비가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어 기적적으로 살 수 있었다고 하면서 그렇게 훌륭한 사제를 죽음으로 몰아낸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심한 자책을 했단다. 오히려 자신이 죽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

신부님과 운명의 엊갈림으로 그는 1995년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단다.

속옷을 입는 것, 먹을 것, 마실 것조차 주지 않는, 그래서 들어가면 모든 사람들이 죽어나오는 그 곳에서 함께 있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기도하며 삶의 의미를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희망이 없는 곳에 희망의 씨앗을 뿌린 것이다. 그 속에서 9명의 사람들이 다죽어나가고 최후의 1인으로 남아 17일간을 살아있다가 결국 독주사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예전부터 몸이 허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도 하나의 기적이라 볼 수 있다.

198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신부님의 놀라운 사랑과 희생을 기리며 '사랑의 순교자' 로 시성하셨다. 피의 순교자는 아니었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많은 사람에게 영혼의 생명을 부여한 신부님께 최고의 명예를 내리신 것이라 생각한다. 같은 조국이었기에 이 곳을 방문했을 때 교황님의 마음은 남달랐겠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 있을 때의 모습>

앙상한 뼈만 남았다. 실제로 원래부터 아주 약했다고 한다.
이 곳에 있었을 때부터... 그런데도 수용소에서의 삶을 이겨냈다는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아우슈비츠에 희망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꼴베 신부의 사랑의 죽음을 알았을 때,
이상하게도 우리 모두에게 '살자, 끝까지 살아남자. 생명은 소중하다'고 하는 힘이 용솟음쳐 올랐습니다.

그 마음의 변화를 나는 지금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아담의 증언>

 

<오른쪽 웃고 계신 분이 콜베신부님>

신부님이 웃고계시는 유일한 사진이라고 한다.
이 사진에 함께 찍힌 수사님 중 한분이 비록 몸은 많이 불편하시지만 아직 살아계신다.

 

<사랑의 순교자>

피를 흘린 죽음이라야만 순교라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어린 시절의 생각이
이 곳에서 '사랑의 순교자'를 만나고서야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입으로만 반복하던 그것을 콜베신부님은 몸소 보여주고 계신다.

 

  

<콜베신부님의 방 입구>

 

<콜베 신부님의 책상과 책장>

이 곳엔 우리나라 수사님이 계셨다. 그래서 자세한 설명까지 들을 수 있었다.
우리 학사님 넘 열심히 들으시네.

그 분의 책상에 앉으면 그분의 숨결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까해서...
콜베신부님이 앉으시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앉으시고 그리고 나도 앉았다.

책상의 반대편에는 몸이 약한 신부님을 위한 조그만 창도 있다.
그 창은 옆방과 통하는 창으로 침대에 누워서 옆방에 있는 다른 수사님을 부를 때 사용했던 것이라 한다.

 


성모기사회, 콜베기념관은 일본에서도 아주 시골에 있다. 인적이 드문 곳에...
이 곳도 박해가 심했을 때 신자들이 숨어들어온 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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